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8월 종파사건 (문단 편집) ==== 소련의 김일성 선택 과정 ==== 1945년 광복 직후 북한에서의 김일성 권력은 그렇게 절대적이지 못했다. 김일성이 최고 지도자이긴 했지만 위의 정파설명처럼 북한 정권 성립된 이후부터 그의 만주 빨치산 그룹(넓게는 그들과 연합한 갑산파)은 허가이의 소련파, 무정과 박일우의 연안파, 박헌영과 이승엽 등 남로당파 등 여러 정파의 견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김일성은 소련파가 아니었는데 소련에서 김일성을 최고지도자로 내세웠다. 그 이유는 소련파에 인지도가 높은 최고지도자감인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련파의 상당수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초 [[프리모리예 지방|연해주]]로 건너갔다가 1930년대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고려인]]들 2세들로,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면서 말이 통하는 소련 공산당원을 급하게 찾다보니 데려온 것이다. 소련파 인사들은 국내 기반이 전혀 없었으며 대개 고려인 2세들이다 보니 [[재외동포|조선말이 통하기는 하지만 서투른]][* 해외교포들을 보면 세대가 지날수록 언어 구사능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3세, 4세쯤 되면 전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물들도 많았는데, 소련파의 대표격인 허가이도 그러했다. 고려인 2세가 아니더라도 1930년대부터 [[프리모리예 지방|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인물들도 있었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홍범도]]를 제외하면 대중적인 인지도가 너무 떨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최고지도자를 대중들이 전혀 모르는 생뚱맞은 인물을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소련파는 소련 공산당 내부에서도 그렇게 명망이 높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고려인이 소련 볼셰비키 주역이 될 리는 없고 소련파 인물은 실무자급인 하급 관료나 위관급 장교가 대부분이었기에 행정업무 투입이라면 몰라도 북한의 간판 지도자로 내세울 수는 없었다. 대중적 인지도도 떨어지고 지위나 경력, 능력 모든 면에서 부족한 이들을 내세운다는 것은 조선인들의 반발을 살 것을 소련군정측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보천보 전투로 인지도를 쌓아올린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운 것이었다. 다만 대중들 사이에서 김일성이라는 인물 자체가 유명해도 위인전의 영향으로 김일성을 여운형이나 이승만, 김구와 비슷하게 노회한 인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 때문에 김일성이 북한에 입성하자 김일성이 생각보다 젊은 모습을 보고 이게 진짜 김일성이냐면서 [[김일성 가짜설]]까지 제기될 정도였는데, 김일성은 군부와의 적극적 접촉으로 최대한 소련에 협조하는 듯한 이미지를 구축하고자 하여 소련측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자신이 지도자가 되고자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소련파는 북한 내에 물적, 인적 기반이 전혀 없고 오로지 소련의 지원이 있을 때만 정치적 힘을 발휘할 수 있었으니, 말 그대로 소련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소련의 후원으로만 연명하는 괴뢰정권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훗날 [[아프가니스탄]]의 친소 정권이 이런 식으로 굴러가다가 1989년 [[소련군]]이 철군한 후 2년간 버티다가 1991년 붕괴했다.[* 물론 미국이 세운 괴뢰정권은 미국이 물러나자마자 몰락했다.] 따라서 소련군정에선 이들 대신 그나마 이름이 알려진 [[김일성]]과 [[박헌영]]을 최고지도자의 후보로 두고 계속 민심을 살피다가, 만주 지역의 항일빨치산 활동과 [[보천보 전투]] 등으로 많은 명성을 쌓고 있던 김일성과 만주빨치산파를 권력 핵심으로 세운 것이다. 대신 소련파를 선전과 언론부서에 집중 배치해서 만주파를 견제하게 하였다. 1946년 박헌영과 김일성이 모스크바 비밀회의에 불려간 것은 일종의 면접이라 할 수 있다. 어차피 [[김일성]], [[김책]], [[최용건]] 등 만주파 계열도 1940년대에 연해주로 넘어가 소련군의 보호 아래에 있었는데 대부분 소련군 88저격여단에 편입돼서 장교 계급을 받고 한반도 침투를 위해 군사훈련을 받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김정일]]이 이 시기에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났다. 참고로 김일성이 1940년에 연해주로 월경하고 김책이 1943년에 가장 늦게 넘어갔다. 원래 소련은 동유럽에서 위성정권을 세울 때도 결코 소련계 동유럽인을 머리로 내세운 적은 없고 대체로 소련과 연줄이 있는 현지의 공산주의자를 내세웠다. 예를 들어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수장을 선택하면서, 유력하게 폴란드계 소련인이자 2차대전의 영웅인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원수가 있었으나 있었으나, 수상이 아닌 국방장관으로 앉히고, 소련 유학경험이 있는 폴란드 현지 공산주의자인 [[볼레스와프 비에루트]]를 대통령으로 앉혔다. 이런 의미에서 소련이 북한 지역에서 이름이 잘 알려져 있고 소련과도 연줄이 있는 김일성을 내세운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물론 [[박헌영]]도 1930년대 소련 모스크바의 국제레닌대학과 동방노력자대학에 유학하면서 공산주의를 학습했기 때문에 소련과 관련이 깊지만 김일성처럼 소련의 충견이 되기 어려운 엘리트 스타일이고, 북한내부의 대중기반이 없는 점에서 탈락한다. 아무튼 광복 이후 북한은 남한은 물론, 중국과 일본보다도 경제적으로 안정화되었고,[* 이 당시에 남한은 물론, 중국과 일본도 초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상황이었다.] 우월한 경제력을 활용해 국방력을 강화시키는데 성공했다, 또한 이승만이 대중의 기대를 저버리면서 [[반민특위]] 해산을 단행하고, [[김구 암살 사건]] 등이 잇따라 벌어지자 이승만에 대한 민심이반이 일어나서 [[2대 총선]]에서 친 이승만파가 개헌저지선조차 확보못하는 대참패를 하였고, [[애치슨 라인]] 선포로 미국이 남한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보류하는듯한 모습을 보였다. 김일성은 경제적 우월성과 남한 정국의 흐름을 보면서 이를 남침을 하면 단박에 통일할 철호의 기회라 생각하며 남침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당시 이승만 정권도 당시에도 맛이 가기는 매한가지였던점도 있다. 국방장관이었던 [[신성모]]가 말로는 북진통일을 외치면서 정작 국방력 증대에 무능함을 보였던것이나 이승만이 내부정치에서 실책을 거듭하며 지지율을 까먹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소련 당국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인적 손실이 위낙에 막대했고,[* 이 당시에 소련 당국이 재빠른 인구복구를 위해 무자녀자들을 대상으로 세금을 늘렸고, 미혼부, 미혼모 가릴거없이 한부모 가정에 대해서 대대적인 지원을 단행했을 정도였다. 그 영향이 지금까지도 남아서 러시아에서 동거와 미혼모, 미혼부에 대한 인식이 관대하다.] 또한 이 상황에서 북한이 남침을 하면 미국이 남한을 지원하여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거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이 때문에 스탈린과 소련 당국에서 북한의 남침에 대해 승인하지 않으려 했지만,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48차례씩이나 찾아가서 남침 승인을 요구했고 스탈린도 처음에는 김일성을 문전박대했지만, 결국 지속적인 요청에 못이겨 남침에 대한 승인을 내주었다. 물론 소련은 전쟁이 터지고 나서도 북한에 대한 대규모 군사지원에 소극적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